

‘이것은 누군가의 회고록이다. 그 누구의 회고록인지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지 않을까. 이것은 그저 소문에 불과한
이야기였을 테니.'
<첫 번째 기억>
비오는 날, 할머니의 굽은 등에 업혀 나풀거리는 긴 빨간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은 그 사람을 따라 난장강으로 향했던
그 때의 일이다. 처음 난장강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아, 아니다. 시체와 해골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장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단 비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동굴에 몸을 뉘였고 그렇게 난장강에서의 첫 날의 기억은 어두워져
갔다.
잠에서 깨어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나를 보고 있던 숙모님이셨다. 숙모님을 포함한 어른들은 모두 피곤해 보였지만 다들 땅을 갈고 있었다.
“...형아?”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나는 어젯밤에 보였던 그 붉은 끈의 남자를 가장 먼저 찾았다. 나의 말에 숙모님께서는 나를 안아 들고 한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잠시 부탁해요. 밖에 나가서 사람들 좀 도우려고요.”
숙모님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고는 ‘읏챠,’ 소리와 함께 나를 받아들었다.
“원아- 잘 잤어?”
“응!”
그의 물음에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 남자의 첫인상은 나에게 미소, 그 자체였다.
<두 번째 기억>
사람이 많던 시장길, 아직 어렸던 나에게 인산인해는 공포였다. 그러다 누군가의 다리에 턱, 하고 부딪혔고 나는 공포에 휩싸여
부딪힌 그 사람의 다리를 붙잡고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렸다.
얼마나 울었을까, 선 형아가 다가와 부딪힌 그 사람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고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훌쩍거리는 나의 눈물을
닦아준 선 형아는 나의 손을 잡고 길을 앞장서 걸어갔다. 가다가 보인 것은 나비 모형의 장난감, 마음에 드냐고 물어보는 형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지나쳐갔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다른 형아가 왜 사주지 않는 거냐며, 선 형아와 잠시 말이 오갔고
결국 다른 형아는 나에게 나비 모형을 포함한 여러 가지 장난감을 사주었다.
“부자 형아!”
나의 말에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처럼 보였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나에게 그 남자의 첫인상은 솔직하지 못한 사람, 이었던 것 같다.
그 날 오후쯤, 이유는 모르겠으나 비오는 날부터 계속 잠만 주무시던 숙부님께서 깨어나셨다. 사람들은 축하하기 위해 맛있는
반찬을 준비했고 나는 부자 형아를 붙잡으며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지만 그는 결국 돌아갔다.
“나는 외 나무 다리를 건너 어둠을 향하네-”
부자 형아가 돌아가고 뒤돌아오는데 부르던 선 형아의 노래가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의 나에게도 왜 그렇게 구슬프게만 들렸는지. 그러나 아마 나는 그때 당시의 선 형아의 마음을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세 번째 기억>
숙부님과 함께 떠났던 선 형아가 어째서인지 숙부님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왔다. 어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은
그때도 느낄 수 있었다. 고모님과 숙부님은 선 형아를 데리고 형아가 지내던 동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와서는 어른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중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은 얘기가 끝났는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고 어리둥절한 상태의 나에게로 숙모님이
다가오셨다.
“...아원, 미안해. 우리가 가면 동굴에 들어가 숨어있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의 모습을 보고 머리를 쓰다듬던 숙모님은 이내 숙부님과 함께 다시 선 형아가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다시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숙모님의 눈가가 붉었다. 고모님은 어른들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고 어른들은 일제히 난장강에서 나가는 방향으로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들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의 눈에서 이내 물방울이 아무 소리도 없이 톡, 하고 떨어졌다.
언제 잠들었던 것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동굴 바닥에 누워있었다. 중간에 깼었는지 비틀거리며 뛰어나가던 선 형아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기억이 났다. 선 형아는 그 이후로 동굴로 돌아오지 않았다.
선 형아가 동굴에서 뛰어나간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나의 몸은 이상하게 점점 뜨거워졌고 의식도 점점 흐려져만 갔다. 선 형아가 돌아올 텐데…. 선 형아가 돌아오기 전까지 이곳을 잘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간신히 숨을 내뱉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고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기도 전에 나는 그만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네 번째 기억>
나는 꽤 오랫동안 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기억도 아직 다 낫지 않았을 때의 기억.
아픈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 바로 부자 형아였다는 사실도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밤에 누군가가 자꾸 보고
싶은데 그게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붉은 머리끈으로 머리칼을 묶었던 한 남자의 뒷모습이 자꾸 아른거렸다.
그런데 가슴이 뻐근해지더니 이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의 나는 그곳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부자 형아 뿐이었으니
그 상황에서 찾아갈 사람도 정해져 있었다.
똑똑- 노크를 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자 형아가 문을 열었다.
“...아원, 지금은 통행….”
통행이 금지된 시간이라는 말을 하려다 말고는 나의 얼굴을 보던 부자 형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들어 올려 품에 안고
토닥거렸다.
“형아... 형아 보고 싶어...”
나의 울먹거림에 부자 형아는 낮지만 포근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익숙하고도 그리운
멜로디였다.
<다섯 번째 기억>
내가 5, 6살이 되었을 무렵에 대략 3년간 모습을 보이지 않던 부자 형아. 아니, 함광군께서 다시 모습을 나타내셨다. 함광군께서는 이전과 똑같이 나를 대해주셨고 가끔씩 토끼들에게 밥을 주러 갈 때에는 나도 함께 데려가시고는 하셨다. 토끼를 처음 본 나에게는 더없이 신기한 경험이었다.
“...”
“...?”
함광군의 옆에서 털썩 주저앉아 토끼들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눈앞에 당근 하나가 내밀어졌다. 당근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함광군께서 무표정으로 나에게 당근을 내밀고 있으셨다.
“...먹어.”
함광군의 말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근을 받아들어 토끼와 함께 당근을 먹게 되었다.
“...함광군, 당근을 심으면 자라서 커다래지는 것처럼 아원도 심으면 키가 쑥쑥 자랄거랬어요!”
“...누가?”
당근을 먹던 와중 갑자기 떠오른 말에 방긋 웃으면서 함광군께 말하면 함광군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 ‘누가?’라고
물어왔다. 그에 나는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말 그 이야기를 누가 했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함광군...”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사과하는 나의 모습에 함광군께서는 사과할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꼭 잡은 채, 다시 운심부지처로 돌아왔다.
<여섯 번째 기억>
한밤중에 누군가가 고금을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이전에도 자주 들렸던 소리이기에 수사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소문이 돌고 있는 중이었다. 고금을 켜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함광군. 함광군께서 밤낮 구분 없이 고금을 켜시는 이유가 궁금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문이 아니라 진실이 궁금했다.
통행이 금지된 시각이었지만 나는 책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함광군의 정실로 다가갔다. 정실 문 앞까지는 갔지만 차마 인기척을
낼 수는 없어 고민을 하고 있던 중 정실 안에서 함광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영.”
‘위영’. ...그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함광군께서 저리 아픈 목소리로 애타게 부르는 것일까.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나의 마음까지 저릿하게 아파오는 것일까.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 나는 다시 나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자리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곱씹어 생각해보았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어렸을 적의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일곱번째 기억>
의뢰를 받게 되어 나와 경의를 포함한 수사들은 모가장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여 우리는 소음기를 설치하였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피리 소리에 귀가 자연스레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곡이었다.
“...경의, 이 노래 귀에 익은데... 고소 남씨 지역의 노래인가?”
경의에게 물었지만 자신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아마 아닐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이내 곡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아, 이 곡은 어렸을 적 함광군께서 들려주셨던...’
“사추! 뭐해!”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와서는 눈을 깜빡이며 남사추를 쳐다보고 있는 남경의가 있었다.
“아, 경의야. 들어와.”
남사추의 말에 남 경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방안으로 들어와 사추가 적고 있던 무언가를 보았다.
“회고록? 뭐야, 회고록 써보려고?”
“응, 경험했던 것들을 되새기며 기록해두면 혹시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남사추의 대답에 이해했다는 듯 ‘아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남 경의였다.
“아 맞다, 오늘 위 선배랑 사추 너랑 나랑 야렵 가기로 했잖아! 그래서 너 부르러 왔어! 위 선배 준비 끝났거든.”
남경의의 말에 남사추는 방긋 웃으며 자리에 일어나 방을 나섰다. 방에서 나와 서둘러 걸음을 옮기니 저 멀리에 보이는 위 무선과 남망기가 보였고 위 무선은 남사추와 남 경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얘들아! 얼른 와!!”
해맑게 말하는 위 무선을 보고는 남 사추와 남 경의, 둘은 저 멀리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저... 위 선배.”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야-”
남사추의 회고록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끝까지 쓰려면 아직 멀었지만 다 쓰게 된다면 가장 먼저 위 선배에게 보여주리라. 그리 다짐하는 남사추였다.
‘솜씨가 좋다고 자랑했지만 괴상한 걸 만들거나 먹으면 배탈이 났어요. 날 무밭에 심어두고 물도 주고 햇빛을 듬뿍 쐬어주면 금방 자랄 거라고 했어요. 친구들도 많이 생겨서 저랑 놀아준다고 하셨죠. 함광군께 밥을 사겠다고 해놓고 돈도 안 내고 도망쳐서 결국 함광군이 돈을 내셨고요. 아마 제가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흐릿한 부분도 있지만 이것만은 확실해요. 저는... 온씨였어요. 위 선배님, 저... 저 원이에요. 위 선배, 보고 싶었어요. 얼마나 그리웠다고요.’
그들이 걸어가는 앞으로의 길들에는 빛이 쏟아지길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