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북군은 이따금 불안함이 엄습하곤 하였다. 원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옆에서 자는 상청화 때문이었다. 세상 모르게 자는 상청화는 입을 벌리고 자고 있어 입가에 침이 고여있었다. 막북군이 가볍게 손을 뻗어 상청화의 머리칼을 쓸자 간지러운지 미간을
찌푸리다가도 얼마 안 가 실실 웃는다. 남의 속도 모르고 웃는군. 한숨 같은 숨을 내뱉곤 상청화를 더욱 품 안에 집어넣으며 눈을
감았다. 상청화는 이따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 어릴 적에는 바람이 좋은 날에 연을 날리러 갔었어요. 하지만 매번 제가 꼴찌였어요. 다들 아버지와 함께 연을 날렸거든요. 거의 아버지들끼리의 자존심 대결이 되어버렸죠.”
새해가 시작되고 나서 인계로 나와 길을 걷던 도중, 언덕 위에서 연을 날리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재미있겠다는 듯 바라보던
상청화는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연을 한없이 바라보는 상청화의 눈빛에는 어딘가 외로움이 담겨 있었다. 막북군에게는 그깟
종이 쪼가리를 하늘에 띄운다는 것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상청화는 그리운 눈빛으로 아이와 아버지가 함께 연을 날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 둘은 온종일 질릴 때까지 연을 날렸다. 상청화는 그 뒤로 연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라면은 먹어도 질리지를 않더라고요. 대왕도 먹어봐요. 아, 인간이 먹는 건 별로예요? 음…예전에는 라면만 먹으며 생계유지를
한 적이 있긴 했었죠. 생각해보니 그때 새로 산 라면을 못 먹었어…. 아니, 아니. 당연히 대왕이 만들어준 라면이 최고죠!
그렇고 말고요!”
감히 막북군이 만들어준 라면 앞에서 다른 라면을 논하던 상청화는 후환이 두려워 말을 그만두고 먹는 것에 집중하였다. 라면을
모두 먹어 치웠지만, 어딘가 아쉬운 눈빛을 하고 있어 막북군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음에는 라면을 다르게 만들어서 그깟
컵라면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리라 결심했다. 이처럼 상청화가 하고 싶어 하면 막북군은 어울려주었다. 글을 적을 때도 도와달라
하면 도와주었고 글에 적힌 문장을 읊어 달라고 하면 그대로 읊어주었으며, 요상한 글을 쓰다 들켜 청정봉 봉주가 찾아오면
제 허벅지에 붙은 상청화를 감싸주기도 하였다.
하루는 막북군이 물었다.
“왜 욕을 먹으면서까지 글을 쓰는 거지?”
이 물음에 글을 쓰던 상청화는 붓대로 제 입가를 툭툭 치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물음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음…그냥? 재미있으니까요…?”
이 상모씨가 쓴 글이 은근 돈벌이가 된답니다. 대왕은 인계에서 돈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죠. 막북군은 글 쓰는데에 흥미가
없었고 상청화에게 신세를 질 정도로 돈이 부족하지도 않아 상청화의 생각을 이해할 순 없었으나, 대답하는 상청화의 눈빛은
매우 진지했고 또랑또랑하게 빛나는 것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여 그러려니 했다. 완만한 생활 속에서 불안함은 일주일 전부터
시작됐다. 가끔 상청화가 잠에서 깨어나 방을 나가서는 한 주향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았다. 덜컥 겁이 난 막북군은 다급하게
방을 나섰는데, 마침 돌아온 상청화 가 오히려 더 놀라서는 다가와 물었다.
“대왕, 무슨 일 있으세요?”
막북군은 기가 차 숨을 뱉었다. 누가 할 소리를. 막북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상청화는 제 볼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말했다.
“저는 그저 측간에 다녀왔습니다. 저 때문에 깨신 건가요?”
“옆에 있던 것이 없으면 깨는 게 당연하지.”
“하하…이제 저는 도망가지 않는다니까요.”
“…그래, 너는 평생 내 곁에 있기로 약조했지.”
상청화는 실실 웃으며 막북군의 팔을 붙잡고 방으로 이끌었다. 상청화의 손길에 따라가는 막북군은 조용히 입술을 짓씹었다.
눈가가 붉고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이 울다 온 모양이었다. 애초에 선인은 측간을 갈 필요도 없지 않은가. 예전 같았으면 왜
울었냐며 다짜고짜 캐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상청화와 가까워질수록 그가 또 저에게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까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막북군은 묻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상청화는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너는 결국 돌아가고 싶은 건가, 가지 못하게 내가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인가.
어느새 인계는 또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상청화는 안정봉에서 업무를 처리하다 몰려오는 졸음을 쫓아내려 막북군과 함께 안정봉을 빠져나왔다. 안정봉 주가 막북군과 함께 걷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 뻔하여 상청화는 일부러 한적한 숲속을 걸었다. 상청화는 말없이 함께 걷는 막북군을 흘끔 보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사사로운 생각에 잠겼다. 다음에는 어떤 글을 써서 팔까,
어느 사제를 희생양으로 삼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곧 안정봉주에게 내려질 연말정산과 새해맞이 일거리들이 떠올랐다.
상정화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아…커피라도 있으면 밤샘 작업은 문제없는데.”
상청화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진 터라 막북군은 늘 묵묵히 듣고 있었는데, 말할 때 표정이 어두워 그가 짧게
물었다.
“네가 방금 말한 커피라는 것은 어디다 쓰는 거지.”
“커피요? 여기에는 자라지 않고 서쪽 나라에서 자라는 나무의 열매에요. 그걸 갈아 추출하여 마시면 숙면을 참을 수가 있게 된답니다. 평소에는 차를 마시며 잠을 쫓아내는데 가끔 마셨던 것이 생각나서 그만….”
“네가 원하면 열매를 구해 내어주겠다.”
막북군이 무언가를 해준다고 할 때마다 상청화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다 금세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본 막북군도 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슬 올렸다. 상청화는 이유 없이 얼굴이 화끈거려 잠시 망설이다, 자연스럽게 막북군의 손을 잡았다. 겨울에는
붙어있을 때마다 춥다고 불평했던 주제에. 막북군은 속으로 그에게 한마디 했으나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꼭
맞잡으며 제 체온과 비슷해진 손을 가볍게 쓸었다. 둘은 한참을 걷자, 넓은 호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꽁꽁 언 호수 위로 눈이
수북하게 쌍인 나무가 비추는 것이 절경이었다. 둘은 가만히 서서 한 폭의 그림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상청화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무거워 보이는 바위를 낑낑거리며 들어 올리더니 호수 위로 던졌다. 꽤 꽁꽁 언 모양인지 호수 위에 얼음은 약간 흠집이 생겼을 뿐, 금이 가질 않았다. 뭐 하는 거지? 막북군의 물음이 담긴 눈빛을 발견한 상청화는 코밑을 문지르곤 앞으로 걸어나갔다.
“인간들은 빙판 위에 미끄러지면서 놀아요.”
아이스 스케이트를 탄 지 오래된 상청화는 괜히 타고 싶어져서 거침없이 빙판을 걸었다. 전용화를 신지 않아서 그런가,
너무 오랜만에 해봐서 그런가. 마음먹은 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 부 닥쳤다.
흡, 상청화는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넘어지지 않게 바둥거렸으나 얼마 못 버티고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코뼈가 나갈 생각에
눈을 꽉 감았는데, 몸은 그대로 쓰러지지 않고 묵직한 팔에 지탱되었다. 상청화는 팔을 꽉 잡고는 고개 를 들어 저를 받아준 이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막북군이 눈앞에 서 있었다. 막북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정말…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군.”
“이, 이건 너무 오랜만에 해보는 거라서 그래요! 흠흠, 오늘은 안 될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와요.”
상청화는 몸을 돌려 빙판 위를 벗어나려 했는데 막북군이 상청화의 팔을 붙잡았다. 붙잡고 있는 손의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묵직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상청화는 두어 번 끙끙거리다 바라보며 물었다.
“대왕, 왜 그러세요?”
“넘어지지 않게 잡아줄 테니 걷고 싶은 만큼 걸어라.”
그는 최대한 배려한다고 생각했으나 단호한 말투에 정말 놀아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상청화는 기분전환 겸 걷기로 했다.
계속 걷고 미끄러지다 보면 예전처럼 빙판을 자유자재로 놀 수 있겠지. 상청화가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걸으면 막북군은 상청화의 손은 꽉 잡고 걸음을 맞추었다. 상청화는 넘어질까 두려웠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두세 바퀴를 빙빙 돌고 나니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겨 굳이 그의 손을 잡지 않고도 즐길 수 있었다. 상청화는 손을 놓고 막북군의 주위를 돌며 외쳤다.
“대왕, 봐봐요!”
“보고 있다.”
상청화는 막북군의 대답에 푸핫, 웃음을 내뱉었다. 거봐요, 제가 잘 탄다고 했죠!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더욱더 빠르게 빙판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찬바람 이 얼굴을 찰싹찰싹 때려 코와 뺨이 얼얼했다. 어느새 쫓아온 막북군은 말없이 상청화를 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몇 바퀴 더 돌다간 내 존재 자체도 잊어버리겠군.”
“하하, 그럴 리가요. 그냥…저도 모르게 어릴 적이 떠올라 마구 달렸네요.”
추억에 젖은 눈을 내리뜨며 말하자 막북군은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조용히 그의 옆에 서서 상청화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혼약을 깨시기 전에 딱 한 번, 이렇게 추운 겨울에 호수가 있는 곳에 놀러 갔었어요. 원래는 얼음을 뚫어
빙어 낚시를 하려고 했었지요. 하지만 그때도 두 분은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어요…. 그때 저는 혼자 빙판 위에서 뛰어놀았답니다. 그러다 얼음이 얕은 곳에 발을 디뎌 호수에 빠지고 말았어요.”
상청화는 바보같이 웃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평소에 막북군이었다면 너답다며 웃었을 텐데, 그는 잔잔한 호수 같은 눈동자로
계속 상청화를 응시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청화는 멋쩍어 잠시 망설이다 먼 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아저씨께서 안 계셨다면 저는 지금 이곳에 서 있을 수 없었을 거예요. 아저씨는 재빨리 저를 건져내어
집 안으로 옮겨주셨죠. 그 분은 제게 울지도 않고 잘 견뎠다며 등을 토닥여주셨어요.“
막북군은 그의 말에 무어라 말해야 좋을까 망설이는 사이 상청화가 먼저 말했다.
“하지만 그때 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얼어있던 호수에서 금이 쩍하고 갈라지더니 손쓸 틈도 없이 상정화가 풍덩, 얼음물 속에 빠졌다.
“상정화!”
막북군은 다급하게 얼음물 속에 손을 덥석 집어넣어 상청화를 꺼냈다. 그는 원래 빙족이기에 얼음물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상청화는 아주 잠시 들어가 있었을 뿐인데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입술이 파래졌다. 막북군은 급히 그를 품에 안고 안정봉에
있는 그의 아늑한 방으로 데려갔다. 얼어붙은 옷 대신 따듯한 옷으로 갈아입혀 이불에 둘둘 말린 상청화는 마치 살아있는 김밥과도 같았다. 따듯한 라면 한 그릇이라도 만들어주겠다며 내려가는 그에게 상정화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난 그때, 울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막북군은 천천히 상청화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이곤 가볍게 떨고 있는 눈꺼풀 위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울고 싶다면 울어도 된다. 내가 옆에서 그칠 때까지 다독여줄 테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