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봐! 괜찮은가?”
몸이 흔들리며 누군가 자신을 깨웠다. 강염리는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깨운 사람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흐릿한 시아로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보여 놀라며 몸을 흠칫 떨었다. 사내는 강염리가 깨어난 것을 보며 안심하며 멀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린 처자가 그렇게 땅바닥에 누워있으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 앞으론 조심해.”
사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났다. 강염리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누군가 위무선을 향해 검을 치켜세웠다. 온 힘을 다해 위무선을 밀어냈더니 목에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 이후 모든 기억이 끊겼다.
‘아선......’
강염리는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살아있는 것이 이상한 상처였음에도 자신은 살아있다. 그 기이한 감각을 느끼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시장통.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헤지고 더러워진 옷이 보였다.
강염리는 운몽 강씨의 여식이다. 한 번도 이런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당황하며 자신의 손을 살펴보았다. 씻지 않아 더러웠고,
고된 생활로 굳은살과 잔상처가 많은 손이었다. 말 그대로 고생을 많이 한 손이었다. 강염리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일으켜
근처 우물가로 향했다. 우물가에 비친 얼굴을 보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 있었다.
“탈사(奪舍).”
다른 사람의 몸을 빌리는 탈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마 본인이 탈사할 것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할 수 없었다.
강염리는 현재 몸의 주인에게 미안해졌다. 바란 것은 아니나 잠시 몸을 빌렸으니 얼른 되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대로 돌아가기 위해선…….
강징이 가지고 있을 자전이 떠올랐다. 자전에 맞는다면 육신과 혼백이 분리돼 혼백이 빠져나갈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에 강징을
보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움이 일었다.
육신의 주인을 위해서는 곧장 운몽으로 가서 강징을 만나야겠지만 강염리는 아주 살짝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바로 돌아가기에는 자신의 마지막이 발목을 잡았다. 위무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죽었으니 얼마나
충격이었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아이. 혼자 남았을 여란이가 보고 싶었다.
강염리는 가장 먼저 금린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난릉에서 눈을 떴기에 찾아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강염리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봤다. 자신의 옛날 모습은 전혀 알아볼 수 없고, 후줄근한 옷은 그냥 길거리 부랑자처럼
보였다.
아쉽기는 했지만, 그냥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면 지나가는 거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강염리는 입구가 보이는 근처 찻집을 향했다. 무엇이라도 시키고 싶었지만, 금전 한 푼 없었다. 아쉬움에 강염리는 벽에 서서 주변을 구경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는데 바빴다. 이렇게 아무에게 눈치받지 않고 편하게 있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주변은 북새통을 이루지만 강염리의 주변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새로운 삶을 사는 느낌이었다.
“...조용ㅎ....!!”
멀리서부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강염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봤다. 정교한 수가 놓인 옷에 명치 부분에는
백모란의 금색 선이 은은하게 빛났다. 등에는 화살통과 아름다운 금빛이 흐르는 장검을 메고 있었고, 미간에는 단사를 찍은 준수한 용모의 소년이었다.
강염리는 멀리서부터 알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이를 쏙 빼닮은 얼굴을 어찌 몰라 보겠는가. 말은 걸지 못하더라도 웃으며 보내주고 싶었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부터 흘렀다. 자신이 죽은 후 아이는 이렇게나 장성했다.
강염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렇지 않으면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강염리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하고 그저 금릉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최대한 그 얼굴을 눈앞에 세기고
싶었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어쩌면 그건 금릉에게 상처가 될지 모른다.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왜 나타났냐고 뭐라 하지
않을까 무서워 다가갈 수 없다.
금릉의 옆에는 남씨 자제 두 명이 함께 있었다. 둘은 금릉과 이야기하면서 장난도 쳤다.
‘좋은 친구를 뒀구나.’
다행이다. 세 사람의 모습이 과거 자신과 강징, 위무선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또 웃음이 났다. 계속 금릉을 보고 있어서
그런가 갑자기 금릉이 자신을 바라봤다. 순간 놀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금릉이 멈춰서자 옆에 있던 두 사람도 금릉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세 쌍의 눈이 강염리를 향했다. 금릉은 빠른 걸음으로 강염리에게 향했다. 강염리는 당황하며 주변을 돌아봤다. 자신을 알아보는
것일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안다. 어느새 금릉이 강염리의 앞에 섰다. 금릉은 자신의 키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컸다.
“아무리 내가 잘생겼다고 그렇지. 왜 계속 쳐다보는 거야.”
“금릉!”
금릉의 말에 사추가 금릉을 말렸다. 오만한 금릉의 말투와 행동에 강염리는 웃음이 났다.
“후후훗...”
“왜... 왜 웃어!”
강염리가 웃자 금릉은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그 외형처럼 성격도 그이를 닮았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일까.
“아씨, 자아도취 하지 마. 분명 사추를 본 건데 오해나 하고 말이야. 그러니 저렇게 웃지.”
“야!”
남경의의 말에 금릉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남경의는 그러면서도 금릉을 놀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사추는 그런 두 사람을 말리면서도 강염리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세 사람을 보고 있자니 계속 웃음이 났다. 정말 잘 지내고 있었구나. 다행이다.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덕분에 맘 놓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짐 하나가 사라지자 다음이 떠올랐다. 사실 물어보기 겁났다.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어쩔까. 부디 현실이 아니기를 기도했다. 강염리는 셋을 향해 입을 떼려 하지만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자들...... 혹시......”
강염리의 말에 시선이 강염리에게로 향했다. 말해야 한다.
“아선.... 아니, 위무선은...... 어떻게 됐나요?”
그들은 강염리를 향해 이상한 것을 물어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염리는 마음을 졸이며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내 금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흥, 알아서 잘살고 있겠지.”
그 말에 강염리는 안심했다. 다행이다. 살아있구나. 눈물이 흐를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아이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다. 돌아오니 눈물이 많아진 것 같다.
강염리의 눈앞에 흰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앞을 보니 남사추가 강염리에게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그 눈물을 거두세요.”
다정하게 웃는 남사추를 보며 강염리는 보답하듯 웃으며 손수건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금색의 손수건이 나타났다. 강염리는 살짝 놀라며 보니 금릉도 자신에게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남경의가 금릉을 바라보자 금릉이 소리쳤다.
“왜! 뭐!”
강염리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감사하다고 하며 금릉과 남사추의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공자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위선배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남사추는 조심스럽게 강염리에게 물었다. 강염리는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조용히 지나가고 싶기도 했다.
“만나지 못해도 괜찮아요. 그저, 멀리서라도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간절한 표정에 남사추는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물론 만나는 것은 상관없지만 무슨 연유인지 모르기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갑자기 금릉이 뒤돌아 금린대로 향했다. 세 사람은 멀어지는 금릉을 바라봤다. 아무도 자신을 따라오지 않자
금릉이 뒤돌아 소리쳤다.
“뭐해! 안 따라오고.”
금릉의 이상행동에 남경의가 남사추에게 속삭였다.
“아씨 왜 저래?”
남사추는 하하 웃으며 강염리와 함께 금린대로 들어갔다. 도착한 곳은 손님방이었다. 일반 수사들이 묵고 자는 방.
금릉은 옷과 욕간을 줄 테니 깨끗이 씻으라 하고는 방을 나섰다. 자신이 이전에 살았을 때와 달리 방은 좁고 허름했다.
당시와 지금의 신분 차가 크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강염리는 오히려 그게 편했다. 딱 이 정도,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관계와 신분. 그거면 충분했다.
가져다준 옷은 금 씨 여 수사가 입는 옷이었다. 아마 수사 중 한 명으로 분장하여 위무선과 만나게 해 줄 생각인 것 같았다.
강염리는 백모란이 새겨진 자수를 만져보았다. 그리움과 함께 씁쓸함이 맴돌았다.
평소의 강염리였다면 금릉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그리움 때문일까, 새로워진 금린대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짧게 구경하고 돌아오자는 마음으로 문밖을 나섰다.
금린대는 강염리의 기억과 비슷하면서 달랐다. 장소마다 새록새록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금린대에 피어있는 연꽃이 보이자
강염리는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걷다 멀리서 금릉이 보였다. 아주 작았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강염리는 금릉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금릉은 멍하니 서서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염리는 그림의 정체를 알고는 자리에 멈춰 섰다. 자신과 금자헌의 초상화였다.
무거워지는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강염리는 죄책감과 미안함, 슬픔.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지만 이를 무시하며 금릉에게
다가갔다.
“부모님이신가요?”
다행히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금릉은 강염리를 한번 보고는 다시 그림을 바라봤다.
“참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이네요.”
“정말 행복했을까?”
두 사람은 그림을 응시하며 말했다.
“누구는 두 사람이 사이가 나쁘다고 하고, 다른 이는 서로 사랑했다고 하니. 본적 없는 난 두 분이 실제로 행복했을지 모르겠어.”
“......”
“처음엔 원망도 많이 했어. 살해당했단 것을 알지만 내 곁에 없잖아. 부모님을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고 싶어도 원수도 죽었으니 누구에게 원망을 할 수 있겠어. 원수가 돌아와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젠... 모르겠어.”
고개를 돌려 금릉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보고 싶지 않았다. 긴 세월을 혼자 안고 갔을 그 마음을 섣불리 위로해 줄 순 없다.
그의 말이 맞다. 위무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것은 나의 선택이었지 금릉의 선택이 아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는
나의 이기심이 오랜 시간 아이에게 상처와 외로움을 남겨주었다.
“못된 부모님이네요.”
“뭐?”
금릉은 화가 난 말투로 강염리를 돌아봤다.
“네가 뭘 알아.”
강염리도 몸을 돌려 금릉과 마주 보았다.
“금 공자에게 이렇게 상처를 준 것을 보면 두 사람은 아주 못된 사람이에요.”
네게 깊은 상처를 줘서 미안해. 너를 외롭게 해서 미안해. 이런 못난 엄마라...... 미안해.
“두 사람은 서로의 이기심으로 금공자를 외롭게 했어요.”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닥쳐.”
“당신을 더욱 생각했다면 그런 선택을 하면 안 됐어요.”
맞아. 난 당시 내 이기심에 눈이 멀어 그 선택을 했어.
“닥치라고!”
“그럼에도......”
다시 돌아가도 난 같은 선택을 했을지 몰라. 그래도......
“그들이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닥…….”
금릉의 눈동자에 강염리의 표정이 담겼다. 서글픈 눈동자에는 따스함이 담겨있고, 미소짓고 있지만 쓸쓸함이 담겨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자신의 아이인 당신을 무척이나 사랑했죠. 단지, 서로를 위한거라 생각했던 선택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던 거죠.”
자헌, 당신이 나를 위해 아선을 찾아갔던 것도. 내 소중한 동생이자 아릉의 외숙으로 함께 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했던 행동도. 그 선택은 다른 이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결국 그들에게 상처만 남겼다.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강염리는 천천히 손을 뻗어 금릉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굳이 그들을 이해하려 공자의 마음을 죽이지 말아요. 그건 그들의 선택이지 공자의 선택이 아니잖아요. 공자는 그 감정을 표출해도 돼요.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
“미워하고 싶으면 미워해요. 원망하고 싶으면 원망해요. 용서하고 싶지 않다면...... 용서하지 않아도 돼요. 누구도 당신의 마음을 강요할 순 없어요. 공자는 공자인걸요.”
별것 아닌 위로임에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금릉은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 강염리는 천천히 금릉을 껴안았다. 토닥, 토닥. 느린 손놀림이었지만 따스한 품과 부드러운 손길에 결국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작은 떨림과 함께 강염리의 어깨가 젖어 들어갔다.
아릉. 내가 사랑하는 아이야. 부족하고 못난 이 엄마를 용서하지 마렴. 지금도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나 때문에 더 이상 네가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단다. 그저 네가 무엇의 구애도 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사랑해. 사랑한단다.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 흘러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만 맴돌았다. 금릉은 마음이 진정되자 현재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금종주가 되는 사람이 모르는 아녀자와 그것도 자신과 동년배인 여인을 끌어안고 울기까지 하다니.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금릉은 다급히 강염리는 밀어내며 소리쳤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다른 데 가서 이야기해봐! 내가 지옥까지 쫓아가 주마.”
금릉은 씩씩거리며 강염리를 노려보지만, 사춘기 아이의 모습에 강염리는 포근한 미소로 그러겠다고 답했다. 금릉은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다 이내 멈춰 섰다. 강염리를 살짝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리고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난 금 공자가 아니다. 금 종주다.”
할 말이 끝난 금릉은 빠르게 사라졌다. 사라진 금릉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강염리는 아직까지 아이 같은 아이가 어느새 종주가 된 것일까 그저 걱정만 앞섰다.
§
그날 이후 평화로운 날이 계속되었다. 금릉의 친구였던 남사추와 남경의는 고소로 돌아간다고 하며 떠나갔다. 강염리는 금릉의
옆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지켜봤다. 아이는 나와 자헌보다 아징과 많이 닮아있었다.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서로밖에 없었으니
당연할지 몰랐다. 그래도 아징이 많이 사랑해 주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금릉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죽은 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듣게 되었다. 위무선은 한번 죽었다 헌사하고,
지금은 운심부지처에서 살고 있다는 것. 당시 모든 사건의 원인이 금광요 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놀라기도 했지만 안타깝기도
했다. 오래 보진 않았어도 강염리가 지켜봐 온 금광요의 삶도 있었기에 강염리는 그저 금광요의 안녕을 기도했다.
마침내 위무선과 만나는 날이 다가왔다. 금릉은 자신의 옆에 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강염리는 거부하며 멀리서 지켜본다고만 했다. 서로 몇 번의 고집을 부렸지만, 최후의 승자는 강염리였다.
대전 앞 멀리서부터 위무선의 모습이 보였다. 헌사했다는 말처럼 예전에 위무선의 모습과는 달랐지만 그는 위무선이었다.
오랫동안 봐왔던 위무선이었다. 남망기에게 장난치고, 금릉에게 자연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하는 모습. 자신이 꿈꾸던 모습. 저곳에 강징과 자신도 함께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괴로움도 외로움도 없이 오직 행복만 가득한 한 쌍의 그림이 눈에
펼쳐졌다.
마음이 뒤흔들렸다. 미련을 갖지 말자고, 모두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미련만 쌓여갔다. 저 사이에
자신도 함께하고 싶다는 꿈. 이제는 이룰 수 없음에도 계속 바라고 바라게 된다. 강염리는 이대로 가다간 자신의 다짐이
무너질 것 같아 그 자리에서 도망쳐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아무 방에나 들어와 문을 닫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선, 아징, 아릉. 모두.... 모두 보고 싶어. 같이 있고 싶어. 자헌, 당신이 보고 싶어요. 왜, 왜 제 곁에 없는 거예요.”
마음이 옥죄어온다. 숨이 막히고 눈물이 흐른다. 처음 탈사를 했을 땐 마치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 같았다. 이생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도록. 맘 편히 잠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신의 자비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모르겠다. 오히려 고통만 더 커졌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사저!”
강염리는 황급히 뒤돌아봤다. 위무선이 숨을 헐떡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강염리는 아니라고 말해야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위무선은 강염리를 끌어안았다.
“사저, 사저......”
알고 있었다. 위무선이라면 자신을 보고 한 번에 강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라고. 구 때문에 만나길 피했던 건데 결국
들켜버렸다. 위무선의 목소리가 떨리며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강염리는 금릉을 위로해 줬던 것처럼 위무선을
위로해주었다. 정말 애나 어른이나 똑같다니깐. 닮은 두 사람이 생각나자 미소가 지어졌다.
“아선, 미안하지만 나를 본 건 못 본 척 해주지 않을래?”
“......”
“너도 알겠지만 난 이 몸에 오래 있을 수 없어. 언제 떠날지 모르는 몸으로 모두에게 걱정시키긴 싫단다.”
위무선은 고개를 들더니 강염리에게 외쳤다.
“이번엔 제가 지켜줄게요. 과거와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 그러니…….”
강염리는 위무선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선.”
“......”
“난 헌사와 달리 탈사한 몸이란다. 주인에게 이 몸을 돌려주어야 하고. 나도 어떻게 탈사하게 되었는지는 몰라.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 매달릴 필요는 없단다. 지금의 순간을 즐기고,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렴.”
위무선은 강염리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지금은 사저도 제 곁에 있는 사람인데, 그럼 어떡해요?”
“후후후. 너에게 다시 그 슬픔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순리에 따라야 한단다.”
위무선과 강염리는 서로에게 하고픈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지만, 그냥 서로를 위해 아끼기로 했다. 그녀의 말처럼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사저.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생각지도 못한 위무선의 대답에 강염리는 살짝 놀라며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그게 누구니? 어떤 낭자인데?”
위무선은 손을 내려 마주 잡았다.
“낭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사저도 아는 사람이에요. 남잠. 남망기. 그가 지금 제 도려이자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강염리는 처음엔 위무선의 말이 장난인가 싶었다. 하지만 마주친 눈동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어느새 이리 커버린 걸까.
자라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자기 외에도 곁을 내어줄 사람이 생겼다는데 안심됐다.
“그렇구나. 아선, 축하해. 우리 세 살 선선이가 언제 이렇게 커버렸을까.”
위무선은 강염리의 무름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선선이는 사저 앞에선 언제나 세 살이에요.”
강염리는 미소 지으며 위무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위영.”
“남잠!”
위무선은 남망기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더니 문을 열고는 남망기를 끌어안았다. 예전에 봐왔던 남망기였다면 싫은 표정을
짓거나 위무선을 밀쳐냈을 것이다. 하지만 강염리의 예상과 달리 남망기는 따스하게 위무선을 마주 안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강염리는 깨달았다.
두 사람 다 진심으로 서로를 좋아하는구나.
행복해 보이는 위무선의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마지막까지 걱정되었고, 돌아와서도 걱정되었던 아이가 이제는 역경을 내딛고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강염리는 남망기에게 다가갔다. 남망기도 강염리를 보고는 손을 풀고 강염리를 향해 인사했다.
강염리도 마주 인사하며 말했다.
“우리 아선을 잘 부탁해요.”
“네.”
눈치 빠른 남망기는 위무선의 행동에 그녀가 강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선을 울리면 제가 데려갈 거니 조심해요.”
“......”
강염리의 말에 남망기는 멈칫하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강염리는 왜 그런지 이유를 몰랐지만, 옆에서 의미를 알아들은
위무선은 폭소했다.
“크크흐흡.... 사저, 그 말은 취소해줘요. 푸후훕.... 하루도..크.. 울지 않은 날이 없어서....하하하하.”
위무선의 말에 오히려 강염리는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운심부지처에서 위무선을 힘들게 한단 말인가.
평소에 울지 않는 아이가 울지 않은 날이 없다니. 강염리는 괜찮냐고 묻었지만 위무선이 괜찮다고 거듭 강조하자 알았다고만
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위무선은 붉어진 남망기의 귓가에 뭐라 속삭이자 남망기가 미간을 찡그리더니 위무선의 손을 잡아끌었다. 위무선을 어딘가로
데려가려 하자 강염리는 당황하며 그들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기분 좋아 보이는 위무선을 보니 그냥 보내주기로 했다.
그렇게 위무선이 사라진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