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이 유랑이라고 하지만, 막상 목적지에 다다르면 생각이 달라졌다. 슬픔에 사무친 목소리와 원한으로
일그러진 면상들을 마주하고 나면 단단하게 얽힌 인연의 실타래의 끝을 잡아 쥐고 누군가 자신들을 이곳으로 인도한 게 아닌가,
하는 기묘한 생각까지 들었다.
§
남자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것은 불과 한 주향 전이었다. 산길을 가던 중 요괴를 만나 꼼짝없이 목숨을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불길한 인기척과 함께 나타난 거미 요괴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사방으로 튀어 오르듯 빠르게 움직였다. 남자는 겁에 질려 바닥에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거미 요괴의 입에는 따로 문이 없고, 곡괭이처럼 생긴 날카롭고 긴 이빨이 8개나 솟아있었다. 살벌하게
생긴 이빨이 팔다리를 물어뜯으려 달려들었다. 남자가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은 순간,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나뭇가지 사이로 요란한 피리 소리와 함께 부적이 날아들었다. 날아든 부적은 붉은 화염으로 변해 거미 요괴를 덮쳤다.
거미 요괴는 격렬하게 포효하며 사정없이 긴 앞다리로 나무와 땅을 찍어 내렸고, 이를 저지하려는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고혹적인 피리 소리가 나무 사이로 휘몰아치며 거미 요괴에게 죽음을 종용했다. 뒤이어 하얀 장포자락을 휘날리며 나타난 인영이 손가락을 튕기자 장골을 뒤흔드는 묵직한 고금 소리가 거대한 숲을 통째로 아우르고 진동했다. 남자가 질끈 감은 눈을 겨우
떴을 땐, 고금을 든 기품있는 손이 날린 장에 거미 요괴는 흔적도 없이 소멸한 뒤였다.
남자는 상인이었다. 최근 산중에 요괴가 자주 출몰한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꼭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길바닥에는 요괴에게 도망칠 때, 흘린 남자의 소지품이 정신없이 흩어져있었다. 면 보자기에 싸서 품 안 깊숙이 넣어두었던
색색의 구슬과 사탕, 산자나무 열매로 만든 당호로, 곶감 따위였다. 남자는 결코 담력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직후라 거미 요괴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오금이 저리고, 손발이 떨려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바닥에 흩어진 소지품을 주우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볼일을 마친 위무선이 바닥에 떨어진 꽃과 나비가 매달린 머리핀과 노리개를 주워들고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누가 봐도 술 좋아하고, 먹고사는 게 인생의 전부일 것 같은 불혹을 넘긴 남자와 그가 흘린 소지품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목숨을 살려주고 보니, 좀도둑인가 싶을 정도였다. 맘에 둔 여인에게 선물할 물건인가, 생각해보려 해도 남자와 같은 연배의 여자가 하고 다니기에 그의 품에서 떨어져나온 머리핀과 노리개는 하나같이 유치했다. 가장 멀리 던져진 면 보자기를 주워들자 안에는
산사나무로 만든 당호로와 사탕, 구슬 따위가 가득 들어있었다.
남자의 소지품을 한데 모아 내려다보니, 하나같이 어린 여자아이가 좋아할 물건들이었다.
흙이 묻은 것은 골라내고, 낙엽이 붙은 것은 떼어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면 보자기를 잘 덮어 건네주었다. 위무선이 물었다.
“누굴 만나러 가시나 봅니다.”
사정은 모르겠으나, 남은 여정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하려고 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남자가 아득한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네. 제 딸아이를 보러 갑니다.”
남자는 오늘 먼저 간 어린 자식의 묘에 가던 길이었다.
죽은 사람의 묘에 떡이나 술을 올리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딸아이는 떡보다는 당과를 좋아했으며, 술은 냄새는 질색했었다.
일 년에 단 한 번, 아이가 혼백이 되어 이승에 다녀간다는데 무엇을 가져다주어야 좋을까 고민하다가 시전 구경을 나가면 제일 먼저 손에 들던 당과며 아껴서 몇 번 하고 다니지도 못했던 머리 장식을 가지고 남자는 산을 올랐다.
여인들이 즐기는 장신구를 만들어 파는 재주가 전부인 상인은 신선을 숭상한다는 수진계 수사들이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일과를 보내는지 알지 못했다. 상인은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가진 게 없었다. 상인은 고민하다가 쌀쌀한 날씨에 옷을
여러겹 겹쳐 입은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위무선은 손사래를 치다가, 막상 손바닥만 한 주머니가 눈에 들어오자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소하지만….”
굳은살이 박인 수더분한 손끝이 내놓은 것은 깨끗한 면포로 만든 주머니였다. 감사의 표시였다. 입구를 동여맨 매듭을 슬쩍
풀자, 맛 좋은 향에 풍겨 군침이 돌았다. 주머니 속에 든 것은 육포였다. 산길을 갈 때에 요기를 하라고 부인이 만들어 준 것이라며 맛이 좋다며 내밀었다.
수사가 요마귀괴를 쫓고, 의를 행하며, 무고한 사람을 돕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위무선이 곁에 선 남망기의 표정을 잠시 살피며, 다시 한번 완곡하게 거절하려 들자. 눈치 빠른 상인은 위무선의 손 위에 면포 주머니를 올려주고 거절 말라며 간곡하게
부탁하고는 재빠르게 길을 마저 갔다. 오금이 저려 뛰는 것인지, 구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서둘러 몇 걸음 떼다가,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갯짓을 몇 번 하더니 고개 너머로 사라졌다.
§
긴 유랑을 마치고 고소로 돌아오는 길이면, 두 사람은 채의진 시전에 들렀다. 시전 입구가 가까워질 즈음, 위무선이 외쳤다.
“남잠, 찹쌀술 냄새야.”
채의진 가득, 찹쌀술이 익어가는 향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위무선이 눈을 밝히며 화색이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남망기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지러운 풍경과 가진 물건과 사람이 넘쳐나는 시전 한가운데에서 찹쌀술 냄새를 느끼기란 어려웠다.
위무선은 두 번 설명하지 않고 남망기의 팔을 잡아끌었다.
상점마다 깔린 좌판은 오색빛깔의 흥미로운 물건과 사람으로 북적였다. 돈이 없어도 오감이 즐거운 것이 시전 구경이었다.
운심부지처 정실에서 고단한 잠을 청할 때는 세상만사가 손안에 깃든 것처럼 평화롭게 느껴졌는데. 하룻밤 사이 새로운 천지가
개벽한 듯 세상 사람들이 주고받을 이야기는 넘쳐났다. 왕래해야 할 돈과 물건은 시전 바닥을 끝없이 채우고 비우고, 다시 채우길 반복했다.
풍신준랑의 등장을 기다린 것처럼 시전의 상인들이 먼저 위무선에게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이 풍신준랑의 정체가
이릉노조 위무선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몇 없었다. 꽃밭에 벌과 나비가 꽃을 알아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위무선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잘생긴 공자님’ 하고 부르는 말에 호선을 그리며 위무선의 입꼬리와 눈꼬리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마치 계절의 흥취를 가득 품은 복숭아꽃과 같았다. 한순간 위무선의 눈가에 그가 어린 시절 누비고 시전의 풍경이 옅게 떠오르고 사라졌다. 기분 좋은 인사에
위무선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살갑고 시원스럽게 외쳐 화답하고, 남망기를 바라보다가 꽃봉오리 터뜨리듯 또 한차례
와르르 웃음 지었다.
작은 수로를 따라 배가 지나다니고 있었으며, 배와 물이 흐르는 강입구 위쪽으로 해가 걸려있었다. 시전의 으슥한 골목 사이를
헤매고, 수로 사이를 잇는 다리를 건넜다. 작은 나룻배를 얻어 물길을 지난 끝에 술을 모르는 남망기의 코끝에도 시큼달달한 찹쌀술 냄새가 느껴졌다.
집채만 한 술독이 늘어선 양조장을 발견한 위무선은 말 그대로 입꼬리가 귀에 걸린 듯 방실방실 웃음을 지었다. 주인장이
다가오기도 전에,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득 늘어선 항아리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중 가장 잘 익은 술독을 찾아다녔다.
방앗간 앞을 서성이는 참새보다도, 생선가게 좌판 위에 올라선 고양이 보다도 까다롭고 예민하게 오감을 발동시켜 술독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중 먼지가 많이 쌓인 항아리는 열외로 하고, 두드렸을 때 소리가 둔탁한 것도 제외했다. 입구를 싸맨 매듭이 헐겁거나, 향이 지독하게 시큼한 것도 골라냈다.
까치발을 들어 머리 더 높은 항아리 입구에 코끝을 대고 향을 맡아 까다롭게 선별한 끝에, 가장 맘에 드는 항아리 고른 위무선은
쾌활하게 웃으며 주인장을 불렀다. 항아리를 두드리며 힘차게 외쳤다.
“주인장, 여기 찹쌀술 한 단지 아니, 두 단지 주시오.”
주인장이 자신의 키보다 높은 항아리에서 술을 꺼내기 위해 사다리를 가져와, 마시기 좋게 작은 술 단지를 채웠다. 술 단지를
받아 든 위무선은 그 자리에서 들이켰고, 남망기가 옥패를 내밀었다.
잘 익은 찹쌀술은 달짝지근한 맛을 내며 입술과 혀끝에 착착 달라붙었다.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혼자 알기 아까운 맛이었다. 술동이를 들고 찹쌀술을 들이켜던 위무선은 남망기를 쳐다보았다.
“남잠, 너도 맛볼래? 이렇게 잘 익은 찹쌀술은 오랜만이야. 이런 맛을 모른다는 건 인생의 낙을 반만 알고 사는 거나 다름없어.”
“괜찮아.”
가규나, 술을 못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허리춤에 술을 가득 채운 술 동이를 두 개나 걸었더니, 상체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휘청였다. 남망기가 재빨리 팔을 뻗어 자신의 쪽으로 위무선의 허리를 감싸 당겨 안았다. 일부러 남망기가 당긴 것보다,
몸을 밀착시킨 위무선은 놀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특유의 살갑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남망기를 올려다보았다.
남망기는 긴 소맷자락으로 위무선을 품에 안으며 속으로 가규 한 줄을 읊고, 귓불을 붉혔다. 그리고 위무선의 귓가에 가만히
속삭였다.
“내 몫의 낙(樂)은 이미 충분해.”
잘 익은 찹쌀술을 마시는 즐거움을 모르더라도 아까울 게 없을 정도로 흡족했다.
§
고소한 기름 냄새가 위무선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번에는 노점이 줄지어있는 큰길가로 향했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고가구와 아름다운 수공예품이 가득한 대로변을 지나, 맘에 드는 노점을 발견한 위무선은 호쾌하게 앞서 걸었다.
뒤따라오는 남망기를 확인하고, 위무선은 전병을 두 개 주문했다. 돈을 건네자, 상인이 솜씨 좋게 종이에 싼 전병 두 개를
건네주었다. 위무선은 입이 짧고, 좋고 싫은 것이 분명했다. 남들이 맛있다고 입을 모으는 산해진미도 자신의 입에 맞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런 까다로운 위무선의 입에도 이 노점의 전병은 아주 맛이 좋았다. 찹쌀 반죽으로 만든 피를 얇게 펼쳐 기름 위에서 튀겨, 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소로 채워진 전병은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전병은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바삭바삭 소릴 내며 위무선의 입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병이란 자고로 따듯할 때 먹어야 맛이 좋았다. 그런데 뒤따라 오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남망기가 보이지 않았다. 위무선은
남망기 몫의 전병을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려야 했다. 건너편 상점에 선 그를 발견하고 부르려다가, 위무선은 의아한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좌판에 놓인 물건을 보고 있던 남망기에게 상점 주인이 다가와 이것저것 묻는 것이 보였다. 남망기의 짧은 대답에 상점 주인은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물건이 아니라는 의미로 묵직한 상자를 안쪽에서 꺼내왔다. 뚜껑이 열린 상자 안쪽을 바라보며 남망기는
한참을 고심하더니, 물건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영롱한 진주와 백금으로 만든 여인들의 머리 장식이었다.
“남잠…?”
위무선의 머릿속에서는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화수분처럼 터졌다. 도대체 누구에게 주려고?
‘글쎄, 남들보다 과묵한 그이가 도려 몰래 여인의 장신구를 사 온 게 아니겠어요?’
어디선가 남의 이야기를 즐기는 여인들의 쑥덕거림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남망기가 선물을 건넬 사람을 추려보려 했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천하의 남망기가 여인에게 머리 장식을 선물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위무선의 옷소매에서 싸구려 연지가
튀어나오는 꼴도 곱게 보지 않는 사람이 남망기였다. 특별한 사정이 있더라도, 도려를 두고 여인에게 삿된 선물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이 모르는 관계나 상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상상해보려 했지만 의심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상대는 남망기였다. 이유는 본인에게 묻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었다.
위무선은 골치 아픈 생각을 오래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남망기가 서 있는 수공예 점에 따라 들어가서 이참에 그에게
어울릴만한 여인의 머리 장식이나, 밝은 살 색에 잘 어울리는 연지를 사서 장난을 치는 게 훨씬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선녀보다 아름답고, 신선보다 신선 같은 사내가 남망기였다. 어울리는 것과는 별개로 내켜 하지 않겠지만.
위무선은 자신이원한다면 남망기가 기꺼이 몸을 내줄 것을 알았다.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위무선은 천천히 남망기가 있는
수공예 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작스럽게 길가에 튀어나온 인영 하나가 쏜살같이 위무선의 곁을 비켜 달려나갔다. 하마터면 부딪쳐 들고 있던
전병을 떨굴뻔했다. 어찌나 흉흉한 모습인지. 두 다리로 달리는 꼴을 보지 못했다면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난잡한
몰골이었다.
그 인영은 열 살도 채 안 된 어린아이였다. 아이는 얼마 가지 못해 행인의 다리에 부딪혀 뒤로 나자빠졌다. 일부러 밀친 것도
아닌데, 아이의 볼품없고 앙상하게 마른 몸은 힘없이 멀찍이 퉁겨져 반쯤 구르다가 쓰러졌다. 행인은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줄
생각도 하지 않고, 지나가던 개가 채이기라도 한 것처럼 혀를 차며 본체만체하고 가던 길을 갔다. 나자빠진 아이의 손에서
무언가 튕기어 나와 위무선의 발치까지 굴러왔다. 그것은 누군가 먹다 버린 만두였다.
하얗고 두툼한 만두피 안쪽에 고기, 대파, 배추를 다져 만든 소를 가득 채워 넣어 포실포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찜기에 올려
익혔을 고기만두를 떠올리면 오산이었다. 아이의 손에서 튀어나온 건 누군가 몇 입 베어먹다가 말았는지, 벌어진 만두피 사이로
얼마 남지 않은 소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이젠 흙바닥을 굴러 이게 말발굽에 차인 흙덩이인지, 먹다 버린 만두 조각인지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이는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키자마자, 빈손을 확인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놓친 만두 조각을 찾기 시작했다.
어쩌면 며칠만의 첫 끼였을 만두 조각은 안 그래도 더러웠던 모양이, 처참해져 위무선의 발치에서 구르고 있었다.
아이는 흙투성이의 만두 조각을 발견하고 울음을 삼키듯 턱 끝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럴 틈이없었다. 아이가 몸을 추스를 틈도 없이, 네댓 명쯤 돼 보이는 패거리가 씩씩거리며 큰길로 달려 나왔다.
아이는 쫓기고 있었다.
위무선 발밑에 구르는 만두 조각을 빤히 쳐다보다가 길 위에 멈춰 섰다. 달려오는 사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이 달려오길 기다렸다가 발을 걸었다.
선두에서 달리던 한 명이 거꾸로 넘어지자, 뒤따라오던 아이들은 넘어진 사람의 팔다리에 걸려 사방으로 쓰러졌다.
네댓 명이 한꺼번에 바닥을 구르자 흙먼지가 일었다. 위무선은 흙먼지가 묻지 않도록 전병을 든 손은 높이 들고,
짐짓 기침 소리를 내며 다른 손으로 얼굴 앞을 휘휘 저었다.
한 녀석이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더니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아야야!! 도대체 누구야?! 어떤 망할 자식이 일부러 발을 건 거야!?”
체구는 마르고 왜소했지만, 목청은 좋았다. 사납게 내지르는 얇고 귀청 따가운 목소리에 사리 분별 못 하는 급한 못된 성격이
드러났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위무선은 녀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글쎄, 난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이번에는 무리 중 가장 몸이 좋아 보이는 녀석이 소리쳤다. 찬밥을 대충 뭉쳐놓은 주먹밥 같은 생김이었다. 손에는 다듬다 만
나무막대를 들고 있었는데, 그게 녀석의 무기인 것 같았다.
“당신이 발을 걸었잖아! 사과해!”
소란을 눈치챈 남망기가 위무선의 곁으로 다가왔을 땐, 이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남망기는 잠자코 설전을 지켜보기로 했다.
모르는 사람이 이 상황을 지켜본다면 세가의 수치라고 욕할 수 있겠으나, 위무선은 이유 없이 남을 욕보일 위인이 아니었다.
흙투성이가 된 무뢰배는 모두 다섯이었다. 주먹밥처럼 생긴 우두머리를 선두에 세우고 기세등등하게 위무선을 노려보며 항의했다. 하지만 상대는 위무선이었다.
위무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모른다고 했잖아. 난대 없이 뛰어나와서 멋대로 넘어져 놓고 사과를 하라니. 막무가내로군.”
되려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적반하장이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
“그래? 그렇다면 너희는 ’무상사존 이릉노조’를 ‘망할 자식’이라고 욕한 값을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무리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뭐?! 이릉..노조?!”
“누, 누가 ‘이릉노조’라는 거야? ”
“설마…!?”
위무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멋대로 생각하게 놔뒀다. 지나가던 행인 중 일부는, 위무선의 허리춤에 걸린 귀신 피리 진정을
알아보고 놀라 사색이 된 얼굴로 바쁘게 자리를 피했다.
우두머리 뒤에 숨은 졸개들은 반신반의하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시전 객잔의 만담꾼들이 묘사하길,
소문 속 난장강 이릉노조는 흉시보다 괴랄 맞은 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내는 차마 빈말로도 못생겼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준수하고, 곱상한 외모였다. 흉이 떼를 몰고 다니기보다는, 객잔에서 여인들과 노닥거리며 술을 들이켜는 모습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술 좋아하는 허풍쟁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불안한 느낌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사내의 허리춤에
걸린 검은 피리가 눈에 거슬렸다. 등 뒤에서 불안에 떨며 웅성거리는 말을 무시하고, 우두머리가 소리쳤다.
“우린 그저 채의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거지 놈을 쫓아내려 했을 뿐이야. 할 일도 없는데, 저딴 거지 놈 하나 혼내주는 게 뭐가
나빠. 자기가 이릉노조라면서, 지금 천하의 이릉노조가 저딴 거지 놈 편을 드는 거야? 이유가 뭐야!?”
‘거지 놈’이라는 말에 위무선이 무뢰배들이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무릇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부와 지위를 막론하고 이름이 있는 법인데. 주먹밥이 말한 ‘거지 놈’이 자신의 이름인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는 쭈뼛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꼴에 수치는 아는지, 멍청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 못하고 봉두난발 한 채 자라나 낙엽과 나뭇가지가 엉킨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또다시 턱 끝만 자글자글하게 주름져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배고픔과 서러움에 북받쳐 붉어진 눈가는 보이지도 않았다.
위무선 조차 두 발로 서서 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천 조각을 걸친 짐승의 새끼쯤으로 착각할뻔했다. 그 정도로 아이의 몰골은 볼품없었다. 오히려 다른 아이들이 괴롭히고 쫓아내려던 게 당연하다 생각될 정도였다.
자초지종을 들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고소에 첫눈이 내린 지 벌써 보름이나 지났는데. 엄동설한에 신발이나, 내의도 없이 맨살이 훤히 드러난 누더기를 간신히 걸친
아이가 먼저 싸움을 걸었을 리가 없었다. 배가 고파서 누군가 먹다 흘렸거나, 남긴 음식을 주워 먹으려 했을 뿐인데.
더럽고 냄새난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었을 게 뻔했다. 위무선이 말했다.
“안될 건 뭐야?”
억지를 부리며 막무가내로 떠드는 말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내뱉는 말은 명료했다.
“네가 뱉은 말대로라면 넌 내가 지금부터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불만이 없겠군. 네 말처럼 사람이 사람 괴롭히는데 이유가
필요하겠어? 너희가 저 아이를 괴롭힐 때 아무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날 욕보인 값은 비싸게 치러야 할 거야. 두 번 다시
채의진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위무선은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엄포를 놓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산한 바람과 함께 사방에 잔잔한 어둠이 깔렸다. 구름이 잠시 해를 가려 생긴 미미한 그늘이었으나
무뢰배들은 알지 못했다. 이릉노조의 살벌한 협박에 겁먹고 두 놈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머지는 오줌을 지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시전 가득 음산한 기운이 가득 찬듯했으며, 골목마다 흉시 떼가 튀어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겁먹은 자신들을 보며 비웃는
위무선의 웃음소리는 흉시 떼에게 습격을 당하기 전 들려오는 끔찍한 전주처럼 느껴졌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곁을 지나가던 말 한 필이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크게 울음소리를 냈다.
때마침 들려온 사나운 말의 울음소리를 흉시의 비명으로 착각하기라도 했는지, 주먹밥과 졸개들은 혼비백산해서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쳤다.
위무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여전히 구석에 주저앉아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다친 곳은 없어? 혼자 일어날 수 있겠어?”
다친 아이를 일으켜줄 생각으로 위무선은 자세를 낮춰 앉아,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이는 미동조차 없었다. 덤불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뻗어 나온 시선은 반대편 손에 달라붙어 있었다. 위무선이 전병을 쥔 반대편 손을 내밀자, 아이는 낚아채듯 전병을 훔쳐
달아났다. 배가 고파서 눈이 뒤집혀 벌인 짓이지만. ‘이릉노조’가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쏜살같이 달려 으슥한 골목으로
사라졌다.
남망기에게 줄 전병을 빼앗기다니.
아이가 달아난 방향과 빈손을 번갈아 보며 위무선은 조금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 소란이 가져왔던 어수선한
공기는 금세 사람들의 발에 치이고, 말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던 위무선은 뭔가 발견했는지, 잠시만 더 복잡하나 시전 길 한복판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여전히 사람으로
가득 차 복작거리는 길 위를 바라보았다. 노점의 좌판은 시야보다 높이 매달려있었고, 사람의 얼굴보다는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그들의 다리나, 손이 더 많이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맛깔스럽고 군침이 도는 냄새는 더욱 진하게 풍기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시전 바닥을 홀로 헤맸던 때의 시야가 딱 이 정도 높이였다.
거리를 떠돌았던 어린 시절은 위무선에게 있어 부모님의 얼굴만큼이나 흐릿한 기억 중 하나였다. 가끔은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잊고 살다가도, 무심코 지나칠뻔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까마득하게 깊숙한 어딘가에서 퍼뜩 떠올랐다 연기처럼
사라졌다.
배가 고파 수레 위에 과일은 만지작거리다가 상인에게 들켜, 회초리 같은 긴 나뭇가지로 손등을 맞고 몹쓸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첫서리가 내리던 날, 잠자리를 찾아 마을로 숨어 남에 헛간을 어슬렁거리기도 했었다. 희미한 감상과 흐릿한 잔상만 남은
기억이었다. 자신의 손등을 후려치던 상인의 생김도, 좀도둑처럼 남에 헛간에 숨어들었던 자신을 눈감아 주었던 노인의 이름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시당하고 쫓겨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약했던 때에도, ‘이릉노조’란 이름만으로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던 시절에도 위무선은 세상 밖에 홀로 던진 것처럼 혼자였다. 수많은 사람 속에 서 있으면서도,
지나간 날을 떠올리며 씁쓸해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술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두 손바닥을 부딪쳐 씁쓸한 마음을 털고 위무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큰한 술이 곁에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돌아선 그곳에는 남망기가 서 있었다.
상황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위무선은 전병을 훔쳐 달아난 아이를 변호하듯 중얼거렸다. 남망기의 단정한 얼굴이 속으로는 안타까워할 거면서도 신경 쓰이냐고 물으면, 도둑질은 나쁘다고 말할 것 같았다.
“길거리를 오래 떠돌다 보면 안 좋은 일을 많이 당할 수밖에 없어. 그렇다 보면 자신에게 손을 뻗는 사람이 도와주려는 것인지,
헤치려는 것인지 알기 어렵잖아. 지금까지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려 들었던 사람이 더 많았을 거야. 배가 고파서 전병이 먹고
싶었던 거겠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자세한 설명이었다. 전병을 훔쳐 달아난 아이처럼, 억울한 상황도 적지 않게 겪었으리라 생각하니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고 해도 남망기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위무선이 말을 마치고 나서도 남망기는 말이 없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물끄러미 위무선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더욱 가라앉았다. 위무선은 남망기의 우울한 표정이 전병 때문인 줄로만 생각했다. 아이에게 빼앗긴 전병이 자신의 것인 걸
눈치채고, 전병을 빼앗긴 게 속상해서 침묵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남잠, 사람 신경 쓰이게 왜 말이 없어? 전병이 먹고 싶어서 그래?”
남망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도 그랬어… ?”
“너무 옛날 일이라 잘 기억 나지 않아. 그런 걸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고 살겠어.”
언뜻 떠올려도 좋지 않은 취급이야 많이 당했었지만 정말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한번 죽고, 살아난 탓인지 전생에 기억은
온전하지 못한 것이 더 많았다. 겪었던 모든 일을 하얗게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가령, 개에게 물렸던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떠올려도 전신에 소름이 돋고, 몸서리쳐질 만큼 끔찍했다.
“그나저나 망기형에게 줄려고 했던 전병을 빼앗겨버렸네. 전병이 아주 맛있었는데. 저기 건너편에 노점이 있어. 내가 다시 사줄게. 남잠.”
다시 전병을 팔던 노점으로 향하려는데, 위무선은 뭔가 잊어버린 것처럼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위무선은 전병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조잘대며, 남망기의 팔을 잡아끌었다. 잊어버린 게 뭘까 - 생각을 하며 노점을 향해 가려는데.
뾰족하고 단단한 것이 위무선의 허리춤을 꾹꾹 찌르는 게 느껴졌다.
위무선은 반사적으로 남망기의 손을 쳐다보았다. 한 손은 자신이 쥐고 있었고, 다른 손은 비어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감이 이릉노조의 허리춤에 함부로 손을 댄단 말인가.
조금 전 달아났던 버릇없던 아이들이 다시 돌아온 것일까, 그렇다면 말로 하면 되지 왜 남에 허리춤에 손을 대는 것일까.
뾰족하고 단단한 게 마치 개의 주둥이 같아 불쾌했다. 마치 남에 몸을 뒤지는 것처럼, 위무선의 다리와 늘어진 옷자락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돌아본 뒤에는 개 두 마리가 서 있었다. 한 놈은 한 발짝 서서 기회를 엿보는 것 같았고, 다른 한 놈은 용감하게 위무선의 허리와
다리 사이로 코끝을 갖다 대고 킁킁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멀찍이 또 다른 한 마리가 개가 총총 가벼운 걸음으로
위무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채의진에 사는 들개가 모두 위무선을 향해 집합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나, 남, 남자, 암..!! 개, 개, 개… 개가..!!”
위무선은 기함하고 말았다.
녀석들이 찾는 것은 육포였다. 개의 꼬리만 봐도 놀라 까무러지는 위무선인데. 개의 길고 단단한 주둥이가 몸을 툭툭 건드리자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질려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남망기의 기백에 개들은 서럽게 우는 소리를 내지르며 달아났지만, 위무선은
이미 정신을 놓은 뒤였다.
§
개의 주둥이가 좀 닿았을 뿐인데. 위무선은 이미 개에게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지를 바들바들 떨며 꼼짝을 하지 못했다.
남망기는 위무선을 들쳐 안고, 그대로 어검을 해서 운심부지처로 향했다. 위무선은 단향목 향이 가득 풍기는 옷자락에 파묻힌 채로 어검을 한 남망기에게 몇 번이나 물었다.
“남잠, 설마 개가 육포 냄새를 맡고 운심부지처까지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운심부지처에 개는 들어올 수 없어. 안심해.”
정실에 도착해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위무선은 몸을 부르르 떨며 침상 이불속으로 숨어버렸다. 새하얗게 질린 모습이 안쓰러워 보여, 몸을 덥힐 수 있도록 화롯불을 가져다주었다. 침상 위에 난데없이 솟아오른 봉우리에
남망기가 손을 얹어 쓰다듬어주자, 위무선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남잠, 아무래도 엉덩이가 얼얼한 느낌이 들어. 바지가 찢긴 것 같단 말이야.”
위무선이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와 침상 끝에 걸터앉은 남망기를 향해 돌아서서 뒤를 보여주었다. 혹시라도 뾰족한 이빨에 걸려
다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눈으로 보고,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봐도 긁히거나 찢긴 자국은 없었다.
“옷도 찢어지지 않았고, 엉덩이도 물리지 않았어. 괜찮아.”
“그럴 리가 없다니까. 다시 한번 잘 봐봐. 분명히 녀석들 주둥이가 닿았을 때, 몸이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네가 전날 밤에 내 엉덩이를 깨물었을 때처럼 온몸이 찌릿찌릿했단 말이야.”
“위영.”
“…아직도 소름 끼쳐.”
위무선이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닌 걸 알았다. 입으로는 위무선의 이름을 불렀지만, 남망기는 귓가가 화끈거려
스스로 자책하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위무선은 당장 바지를 벗어 확인해야겠다며 의대를 풀고 있었다. 여느 때라면, 위무선이 쥐고 있는 저 의대는 진즉에
남망기의 손에 열려 흐트러져 정실 바닥에 나뒹굴어 있었겠지만. 남망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늘따라 최대한 참았다.
엉거주춤 이불 속에서 기어 나온 위무선의 허리를 당겨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쉽사리 불쾌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는 위무선에게 장단을 맞춰주었다.
“내가 낫게 해줄게.”
옷을 두른 기품이 넘치는 외관과 달리 남망기의 품은 유난히 넓고 아늑했다. 안겨 어리광을 부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옅은 체향과 진한 단향목 향이 어우러진 남망기 특유의 향취에 위무선은 그의 품에 안긴 것만으로도 숨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단단한 팔과 든든한 어깨에 고개를 눕히고 기대하는 눈빛을 띠자, 남망기가 귓불을 붉히며 코끝이 닿을 거리까지 좁혀 들어왔다. 범과의 짐승이 기분 좋을 때면 낸다던 그르렁거리는 숨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위무선의 뺨과 목덜미를 다정스럽게 쓰다듬으며, 품 안 깊이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가슴팍에 고개를 비비며 의지하는 것이
느껴졌다. 옷깃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힐 정도로 느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입술을 맞췄다. 귀한 약도 급하게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언젠가, 입을 맞춰주면 아프지 않을 거라던 위무선의 말을 떠올렸다.무서운 꿈에 시달린 것처럼 창백했던 낯빛에 쌕쌕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뺨과 입술에 빨갛게 열이 오를 때까지 정성 들여 다정하게 간지럽혔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애처롭게 얼어있던 위무선의 눈동자가 차츰 활달한 온기를 띄는 게 느껴졌다.
위무선 본연의 눈빛이었다. 홀로 쉽게 가라앉힐 수 없었던 불안이 해소되자, 위무선은 슬그머니 의대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남망기가 손등을 다급하게 움켜잡으며 곤란한 얼굴로 말렸다.
“오늘, 함께 가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
§
밤바람을 타고 술시를 알리는 각루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남망기가 함께 가줬으면 하는 곳은 다름 아닌 고소남씨의 사당이었다. 사당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숙연한 기분이 들어 천하의 위무선조차 쉽게 말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대대로 고소남가 조상님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본당은
벽면 가득 경전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선문 세가 중 손꼽히는 고소남씨의 사당이었으나, 외관은 고행승이 머무는 사찰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세속의 사치스러움이나, 삿된 아름다움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정갈할 것을 미덕으로 손꼽는
고소남씨다웠다.
정면을 가득 채운 촛불과 위패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오늘이 어머니의 기일이야.”
청형군의 위패와 나란히 선 또 다른 위패는 남희신, 남망기의 어머니인 남부인의 것이었다. 선문세가에서는 수사가 죽더라도
민간에서 치르는 것과 같은 번잡한 겉치레는 거의 하지 않았다. 기일이 다가오더라도 제사는 치르지 않고, 가까운 친지들이 찾아와 향을 올리고, 인사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향로에는 먼저 다녀간 남희신이 꽂아놓은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란히 놓인 위패를 앞에 두고, 남망기가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그것은 위무선이 줄곧 주인이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었던 여인의 머리 장식이었다. 영롱한 빛을 내는 진주알과 백금으로
만든 머리 장식은, 섬세한 양각이 돋보이는 물건이었다. 돈이 있으면 누구나 살 수 있는 물건이었지만, 어지간한 인물이 아니라면 소화하기 힘든 세련되고 우아한 분위기가 가득한 장식이었다. 남가형제와 닮은 정갈하고 고아한 미인이 떠오르는 물건이었다.
착각이겠으나, 위무선은 남망기가 고른 머리 장식을 보는 순간 그의 어머님을 뵌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망기는 오랜만에 뵙는 어머님에게 근황을 속삭이듯 위패가 놓인 단상 앞에 잠시 멈추어 서 있었다. 위무선은 그런 남망기를
지켜보았다.
사당에서 걸어나오며, 위무선은 남망기의 곁에 붙어서 걸으며,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사당에서 느꼈던
것들을 조잘대었다. 마치 남망기가 선물한 그 머리 장식을 하고 기뻐하던 그의 어머님을 뵙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 들뜬 목소리로
살갑게 속삭였다.
“낮에 숲에서 만났던 상인을 보고 어머니께 드릴 머리핀을 살 생각을 했던 거지? 네 어머니가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을 거야.
네 어머니는 틀림없이 아주 아름다운 분일 테니까. 네가 고른 머리 장식도 아주 잘 어울리셨을 거야. 아주아주 좋아하셨을 거야.”
“응.”
남망기 또한 자신이 선물한 머리 장식을 하고 기뻐하는 어머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사당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하얀 돌이 깔린 오솔길을 걸어, 생전 남부인이 지냈던 거처를 지나쳤다. 한실에 비하면 작고 초라해
항상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오늘은 예년과 다른 기분이 들었다.
“남잠, 가끔은 어린 시절, 네 모습이 궁금해.”
“알고 싶어?”
위무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언젠가 상상했던 어린 남망기의 모습을 늘어놓았다. 자신이 없었던 시절의 상대를 상상하는 건
위무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장담하는데. 넌 무척이나 어머님이 사랑하는 막내아들이었을 거야. 말수가 적고, 애교가 없었지만, 어머니가 아주 많이
귀여워하셨을 거야. 장난을 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귀여웠겠지?”
“맞아.”
“하지만 이런 건 어디까지나 내 짐작이잖아. 네 입으로 듣고 싶어. 어린 시절에 너는 어떤 아이였는지, 홀로 있을 때는 무얼 하면서 시간을 보냈을지. 고민은 없었는지... 모두 알고 싶어.”
“나도 마찬가지야.”
“남잠, 너도 내게 아직 궁금한 게 있어?”
“있어.”
말수가 적어, 무심한 성격이라 치부되기 쉬운 그였지만 실제와 달랐다. 용담꽃이 가득 핀 길을 걸으며 남망기가 위무선의 몸을
품 안에 감싸 안고, 손끝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밤새도록 물어봐도 괜찮아. 너라면 무엇이든 대답해줄 수 있어.”
좋은 것만 주고 싶고,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기쁘고 행복하기만 했으면 싶은 그이지만. 위무선은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남은 여생과 함께, 삶과 혼재할 슬프고, 원망스러운 기억도 모두 함께하기로 그와 함께 다짐했다.
“서두르지 마. 시간은 많아.”
모든 시간 속에 함께 할 수는 없어도, 그가 존재한 모든 순간을 사랑하리라 맹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