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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하야.”

 “예, 사존. 제자를 부르셨습니까? 당과를 드시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발 시중을 들어드릴까요, 아니면-.”

 “진정하거라. 그런 것이 아니다.”

 간밤에 정신없이 한껏 사랑을 나눈터라 지칠 법도 하건만, 누가 혼세마왕이자 하렘물의 남주 아니랄까 봐 낙빙하는 정인의 부름에 벌떡 일어나 꼬리를 살랑거렸다. 지나치게 활기찬 자신의 제자를 부드럽게 잡아 제 옆에 눕힌 심청추는 입가를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이슬이 촉촉하게 맺힌 이른 아침, 긴 속눈썹이 살랑거릴 때마다 드러나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어찌나 벅차던지. 누가 보더라도 애정이 담뿍 담긴 그 눈을 본다면 가슴 한편이 벅차오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 생각이 그의 하나뿐인 사존의
총애가 다른 이에게 가는 망상으로 이어질 때쯤이었다.

 “빙하야.”

 “예, 빙하 여기 있습니다.”

 “전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심청추는 그리 말하며 낙빙하의 등을 느리게 토닥였다. 큰 몸을 욱여넣어 겨우 품 안에 들어간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으나
그저 심청추의 심장 소리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음에, 그의 향을 한껏 들이마실 수 있음에 행복했다. 그는 작게 웃으며 지난날
심청추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의 사존은 그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던 것도 같았다.

 졸리느냐?

 그것을 떠올리니 어쩐지 눈꺼풀에 돌덩이를 올려둔 듯 무거워져 그는 답지 않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에 푸스스 웃으며 저보다 한참은 더 큰 낙빙하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심청추는 그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등장인물, ‘심청추’ 와 관련된 히든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부

 

 낙빙하는 생전 들어보지 못한 괴상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목소리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았으며 높낮이마저 없는 것이
인간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눈을 번쩍 뜬 낙빙하는 사방을 경계하며 본능적으로 정양검을 꺼내 들려 했으나 품에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어두운 이상한 공간에는 반투명한 창이 빛을 내고 있었다.

 “사존? 사존! 어디 계십니까?”

그가 창에 관심을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자 반투명한 창은 한 번 더 반짝거리며 ‘히든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따위의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였다.

 “사존을 어떻게 했지?”

 

 [히든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낙빙하는 마기와 영기를 이용해 공격하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그 어떤 것도 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손으로 저 네모난 창을
부술 수 있기라도 한다면 좋으련만, 그조차 여의치 않아 낙빙하는 이내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불도저처럼 자리를 지키고 선 네모난 상자는 부술 수도 없지만 어째서인지 낙빙하를 공격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네모난 상자 속,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단어인 ‘심청추’는 그 단어 하나만으로 낙빙하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한참을 노려보던 낙빙하는 지금으로선 심청추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방도는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시금 심청추를 놓쳐버렸다는 것을 못내 인정하기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요구를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니 하얗고 뾰족한 무언가가 허공에서 움직여 ‘수락’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그리고 ‘수락’ 버튼이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눌리니 새까맣던 공간이 빛으로 가득 찼다. 아무리 혼세마왕이라 한들 눈을 멀게 할
기세로 몰려드는 빛을 피할 방도가 없어 눈을 꾹 감았다. 그는 머릿속에 어떤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본 시스템은 ‘YOU CAN YOU UP, NO CAN NO BB’의 이념에 따라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빙하야, 사실 사존이 네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사존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아느냐?’

 ‘사존의 이름은…, 내 이름은-.’

 

 “저기요, 일어나세요. 괜찮으세요?”

 낙빙하는 어깨를 툭툭 치는 누군가의 손길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이내 다른 공간으로 이동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뜬 이곳의 첫인상은 ‘시끄럽다.’ 였다. 사람들의 말소리, 신발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강아지가 짖는 소리,
정체 모를 수레들에서 나오는 찢어질 듯한 소리 따위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많이 아파요? 119라도 불러줘요?”

 소음에 인상을 찌푸리던 그가 어딘가 익숙한 말투에 눈을 크게 떴다. 방금까지 머릿속을 헤집던 소음이 말끔하게 걷히고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에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낙빙하는 눈앞에 선 남자의 길고 늘씬한 다리와 마른 몸, 그리고 날카로우면서 어딘가 퇴폐적이며 방어적이기도 한 남자를 가만히 살폈다. 웃지 않아도 꽤 온화한 편이며 말씨는 사근사근 곱기만 하며 풀과 대나무 향이 나는 ‘그’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기보다는 날카로웠으며 풀과 대나무보다는 바다 향이 났다. 그의 손에는 늘 반쯤 접고 다녔던 접선 대신
진한 청록색의 네모난 천 가방이 들려있었으며 바람에 흩날리던 긴 머리는 뭉툭하게 잘려있었다. (낙빙하는 자신의 머리와 의복
또한 눈앞의 남자와 비슷하게 바뀌어 있음을 조금 지나서야 알았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심청추와 닮은 구석이 하나 없는 그를 보고서 낙빙하는 심청추를 떠올렸다. 확신할 수 있다.
이 사람이 그의 사존이다.

 “사존, 저를 모르겠습니까?”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사존, 저예요. 낙빙하예요.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겁니까?

 넋이 나간 낙빙하가 멍하니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스스로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것도 모른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했다. 그에게 경멸을 받은 적도, 그에 의해 무간 심연으로 떨어진 적도 있었으나 이런 식의 반응은 상상도
못 한 종류의 것이었다. 모른 척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낙빙하가 누구인지 존재 자체를 잊은 것이다. 순간 머리가 텅 빈 것만 같았다. 이대로 그를 놓쳐야 하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몇 번이고 그를 놓치고, 잃고, 보내고,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해왔다.
싫어. 여기서 당신을 다시 놓치라고? 눈앞에 이렇게 선명히 존재하는 당신을?

 “저, 혹시 많이 안 좋으시면 저희 집에 가실래요?”

 “예?”

 “그, 부담스러우시면 안 가셔도-.”

 “정말 가도 되겠습니까?”

 아, 그게.

 보이지 않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거리는 남자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것이 어찌나 처연하던지. 남자는 자신이 오늘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자신의 감이 그를 두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을. 차마 길거리에서 홀로 울게
내버려 둘 수 없는 무른 마음 탓이지.

 그리하여 180이 조금 안되는 남자와 2m는 훌쩍 넘는 (물론 체감상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190cm가 조금 안 되었다) 장신의 남자가 나란히 좁은 골목을 걸었다. 특히나 남자를 따라 걷는 낙빙하는 워낙 골격이 크고 그 미모가 감탄할 정도로
미인인 탓에 더더욱 눈에 띄었는데, 눈물까지 뚝뚝 흘리고 있으니 이목을 끌기 부족하지 않았다.
이러한 탓에 심원은 이 정체 모를 남자가 많이, 아니 아주 많이 부담스러웠다.

 낙빙하는 빨간 담벼락을 굽이굽이 지나 높고 깔끔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심원은 옷이 늘어날까 한소리 할까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어 그냥 두었다. 무엇보다도 남자에게 쓴소리 하나 하기가 달갑지 않았다. 그뿐이랴, 분명 처음 봤음에도 어쩐지 이 사람은 저에게 해코지 하나 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묘한 안도감과 어딘가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큰 형이 보았다면 한 소리 들을 것을 각오해야겠지만, 어차피 같이 살지도 않는데 그가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심원이 문을 열었다. 낙빙하는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바다 향을 몰래 들이마셨다. 한 편에는 금이 세워져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심청추가 직접 그린 수묵화와 수려한 글씨로 채워진 하얀 종이가 벽에 걸린 죽사와는 달리 하얀 벽지와
검은 가구가 덜렁 놓인 커다란 집은 사람이 사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복도를 지나면 보이는 큰 방은 컴퓨터와 한 면이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낙빙하는 단번에 그곳이 심청추가 가장 아끼는 곳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노려보곤
이내 거실에 놓인 사진들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 저기요. 집은 어디세요? 가족은요?”

 심원은 심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을 데리고 있다가 납치로 고소당하고 싶지 않은 평범한 현대인이었다. 차마 그 자리에 두고 올 수 없는 어떤 끌림에 답지 않은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 사람을 평생 책임질 것도 아니었다. 사정은 모르겠으나 말끔한 차림새며 얼굴을 보아하니 돌아갈 집은 있을 터이니 돌려보내는 것이 맞았다.

 낙빙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가 지을 수 있는 한도 내의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로부터 그의 사존은 그의 이러한
얼굴에 약했으니 어쩌면 불쌍한 척을 하면 허락해줄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돌아갈 곳도, 기다릴 사람도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사존을 찾아왔으나 그의 사존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돌아갈 곳도, 기다리는 사람도…….”

 이 불초 제자에게는 사존 뿐인데. 낙빙하는 진심을 다해, 애원하며 매달리듯 심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고 있노라면 저를
기억이라도 해줄 것만 같아서. 사슴 같은 눈망울이 다시금 애처롭게 떨리는 것을 본 심원은 우선 이 답 없는 사내를 달래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소매를 들었다. 옷 소매로 눈가가 따갑지 않도록 살살 닦는 것이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 심원은 잠시 움찔했다.
예전에도 이리 누군가의 눈물을 닦고 달랬던 적이 있던가?

 심원의 이상을 느낀 낙빙하의 검고 깊은 눈동자와 진득하게 얽히는 것만 같았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습니까?”

 “빙하라고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빙하.”

 심원은 귀신에 홀린 듯 어딘가 익숙한 두 글자를 입속에서 굴렸다.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반복해 부르던 심원은 이내 짧게
신음했다. 낙빙하! 그것은 그가 즐겨보는 종마 소설인 ‘광오선마도’의 남주의 이름이었다! 이런 우연이 다 있을 줄이야.
밥 먹듯이 ‘낙빙하’가 나오는 소설을 보니 그의 이름 또한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가슴 한구석을 불쾌하게 만드는 기시감의 원인을 알아낸 심원은 한 층 시원한 얼굴로 낙빙하와 마주했다. 그를 보고 있자면 원인 모를 애틋함 같은 것이 느껴졌으나 그것은 필시 자꾸만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남자의 불안정함 탓이리라. 보라! 저런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는데 어떤 이가 감히
동정심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 심원은 지금 당장 그에게서 정보를 얻기보다는 그를 달래기로 결심했다. 우선 심원은 그의 등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대고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그, 빙하, 여기로…….”

 존대하려던 심원은 저를 빤히 쳐다보는 사내가 눈빛으로 저에게 무언의 호소를 하는 것만 같아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된 사내가 예민하기로는 사춘기 소녀보다 더하다. 이 여린 사람을 다시 울리고 싶지 않았던 심원은 한숨을 푹 쉬며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이 사람이 상처받지 않을까를 고민하려던 심원은 낙빙하가 아까부터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낙빙하는 심원의 가족사진을 보고 있었다.

 “저분들은 가족입니까?”

 그를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 영 갈피를 잡지 못했던 터라 심원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걸로 충분한 듯
낙빙하는 고개를 돌려 심원을 마주했다.

 ‘빙하야, 사실 사존이 네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사존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아느냐?’

 ‘사존의 이름은…, 내 이름은-.’

 사존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러한 것일지도 몰랐다. 낙빙하는 전부는 아니었으나 그가 말하던 ‘진짜 이름’과 ‘그가 살던 세계’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곳은 네모난 창이 말하던 ‘히든 스토리’ 따위가 아니다. 이것은 사존이 실재하던 세계였다.
낙빙하는 그의 사존이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알지 못했다.

 “저는 당신이 궁금해요. 제게 알려주시겠어요?”

 심원은 낙빙하의 갑작스러운 요구에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심원의 삶은 큰 굴곡이랄 것이
없었다. 부유한 상류층의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다정한 형의 보살핌과 무뚝뚝하나 가족을 위하는 남동생, 그리고 붙임성 좋은
여동생과 사 남매를 사랑하는 부모님. 낙빙하를 향했던 그의 다정함은 그곳에서 기인한 것이 분명했다. 누가 보아도 심원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사랑받고 있었고, 존중받고 있었으며, 그가 누려야 할 것들을 온전히 누리고 있었다.

 

[선택지를 고를 수 있습니다. 고르겠습니까?]

주의 : 엔딩 분기점이 갈리는 지점입니다.

선택에 따라 이야기의 결말이 바뀔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결말이 바뀐다는 게 무슨 소리지?’

 

[등장인물 ‘심원’은 본래의 세계로, 영혼을 잃은 ‘심청추’의 육체는 시스템의 규정에 따라 사라지게 됩니다.]

 

 ‘물어볼 것이 있다. 사존 또한 나처럼 ’심청추‘가 되었나?’

 

 [시스템 규정상 그것은 메타 발언으로 규정되어 말할 수 없습니다.]

 

 낙빙하는 당연히 심청추를 본래의 세계로 데려가고 싶었다. 고민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막상 그를 데려가려고 하니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그를 데려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낙빙하는 어미 잃은 슬픔을 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볼 수 없는 슬픔과 홀로된 외로움과 고립감, 지독한 그리움을 잘 알았다. 가짜 옥관음을 쥐고 살았던 유년 시절의 외로움, 슬픔, 절망을 알았다.

 자신의 세계에서 심청추의 삶은 어떠했던가.

 그는 누명을 썼고, 수옥에 갇혔으며, 낙빙하를 위해 죽었었다. 죽은 뒤에도 그는 몇 번이고 낙빙하를 구하려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반면 이곳에서의 삶은 평화로웠고, 사랑만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가족은 온전했고,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번이고 겪어야 할 죽음의 위험도 없이 그저 안락하고 따뜻한 세상에서…….

 그러면 낙빙하는?

 과연 심청추가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가. 이리 상상하는 것만으로 숨이 턱턱 막혔다. 그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

 

그가 없다면 낙빙하는 정말로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가 ‘낙빙하’라는 존재를 잊어버렸다는 사실로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불안하여 미칠 것만 같은데, 그가 없는 세계에서 평생을 살라는 것은 죽으라고 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사존, 사존 없이 제가 어찌 삽니까? 제 삶은 당신이 알려준 것뿐인데. 제 모든 다정도, 사랑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 당신이
알려준 것인데.

 ‘빙하야.’

 어디선가 심청추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이것은 심원의 목소리인가? 어느 쪽이든 낙빙하는 간절했기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축축해진 얼굴은 열로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빙하야, 사존이 늦어서 미안하다. 잘못했다. 울지 말아라, 응?”

 “정말, 사존입니까?”

 낙빙하를 바라보는 심원의 표정은 전날 새벽 심청추의 것과 같았다. 심원은 낙빙하의 얼굴을 소매로 부드럽게 닦아주며
문신이 있던 자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가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주먹 쥔 손으로 가볍게 낙빙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스승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빙하가, 빙하가 잘못했습니다.”

 “설마 혼례식까지 올려놓고 이 스승을 두고 떠나려던 것은 아니고?”

 “사존, 불초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저는 그저…….”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낙빙하의 붉은 눈가는 금세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심원은 그가 와앙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얼른 품에 안았다. 낙빙하는 그제야 심청추의 심장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원 또한 낙빙하 못지않게 불안했다. 낙빙하와 거의 비슷하게 시스템의 알림을 받은 그는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그를 당연히 데려갈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낙빙하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잿빛이 되어갔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심원은 심장이 철렁했다. 나랑 평생을 하자더니, 이렇게 나를 두고 가겠다 이거야? 다소 드라마 주인공 같은
대사였으나 여하튼 심원의 마음속은 갓 빅뱅이 일어난 우주처럼 혼란스러웠다. 몇 번이고 부르고서야 저를 돌아본 낙빙하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것을 보고 나서야 심장이 다 아려왔다.

 “빙하야, 사존이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예?”

 “사존이 그러지 않았느냐. 이제부터는 너를 선택할 것이라고.” 

 눈물이 맺힌 눈동자가 반짝이며 떠졌다.

 “이제 내겐 너뿐이다. 너만이 내 모든 것이다.”

 “사존……. 저도, 이 제자도 사존 뿐입니다. 사존이 제 전부이고, 사존만이…….”

 “그래그래, 그러니 얼른 돌아가자꾸나. 당과가 먹고 싶구나.”

 “네, 제자가 열과 성의를 다해 만들어 오겠습니다!”

 심원, 심청추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지며 사라지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에게 안겼다.
낙빙하의 품에서 바다 향이 났다. 심청추는 그것을 기분 좋게 마시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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